그래서 아아. 당신은 이 나라의 왕이 되었구나. 연화는 절벽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원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머리는 빨리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된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곳으로 달려가 묻고 싶었다. 아비를 죽여 왕의 자리를 얻었어야 했느냐고, 죽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느냐고. 연화! 윤의 외침에 연화는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이 곳에 있는 건 연화 자신에게는 좋지 않을 터였다. 연화는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키쟈와 학이 열어주는 퇴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연화는 이곳저곳 상처 가득한 학의 손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만 아니였더라면, 이런곳에서 고생하지 않고 궁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학이였다. 친우에게 검을 겨누지 않아도 되었을테고, 이리 다칠일도 없을테고, 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연화는 금방이라도 치밀어 오를듯한 눈물을 애써 참으며 붕대를 꺼내 학의 손에 감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학은 씨익 웃으며 연화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연화를 위해서라면 친우에게 검을 겨눌수도 있다. 성의 호화로운 생활도 포기할 수 있다. 당신의 웃는모습만 볼 수 있다면, 그 외의것도 다 포기할 수 있는 자신이였다. 물론 공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그러니 울지마세요. 울면 더 못생겨집니다."
"아,안울어!"
연화는 재빨리 고인 눈물을 닦고는 붕대를 꽉 묶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준비를 한다며 윤에게로 걸어갔다. 학은 연화가 감아준 붕대가 감긴 손을 들어 제 입에 맞췄다. 희미하게 연화의 냄새가 나는 듯 했다.
* * *
탁-. 학은 다듬던 대검을 내려놓고 제 옆에서 잠을 자는 연화를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분명 아파했겠지. 학은 연화가 깨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쓰게 웃었다.
학은 수원이 연화의 마음을 배신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연화의 아버지 일이 죽은 그 날. 피가 묻은 칼을 들고 싸늘히 연화를 쳐다보는 수원의 모습도, 비속에서 주저앉은 채 울고 있는 연화의 모습도 낯설었다. 수원이라면 연화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을 숨긴 채 곁에서, 당신이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살겠다. 그리 생각했다. 수원이라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 *
"으음..“
연화가 추운 듯 몸을 웅크리자 학은 연화가 덮고 있던 천을 목까지 덮어 올려주고는 자신이 덮고 있던 천을 연화가 덮고 있던 천위에 덮었다. 조금은 따뜻해 졌는지 한결 편안해 보이는 연화의 표정에 학은 희미하게 웃었다.
성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라던 공주는 밖으로 나오며 강해져 가고 있었다. 상처 하나, 물집 하나 있지 않았던 고운 손은 활 연습으로 이곳저곳 상처며 물집이 잡혀있었고, 언제나의 고운 옷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항상 따뜻한 방이 아닌 숲 속에서 노숙을 해도 이젠 익숙하다는 듯 잠을 청하는 연화의 모습이 학에겐 새롭게 느껴졌다.
사락. 약간은 뻣뻣하지만 부드러운 머리칼이 학의 손에 휘감겼다. 붉디붉은 머리카락. 연화는 제 머리색이 맘에 안든다 했지만 학은 연화의 머리색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의 색. 학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합니다. 공주님."
조용히,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학은 연화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원합니다. 언제나 곁에 있길 바랍니다. 차마 연화앞에선 하지 못하는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좋았다. 곁에 있는 것. 그 하나만 영원할 수 있다면.